켄슌몬인 신다이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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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켄슌몬인 신다이나곤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여성으로, 12, 13세 무렵 켄슌몬인의 뇨보로 출사했다. 그녀는 타이라노 코레모리의 정실이 되었으나, 남편이 자결하고 아버지가 처벌받는 등 불운한 시기를 겪었다. 이후 재혼과 사별을 반복하며, 딸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겐큐 10년에는 아들 타이라노 타카키요가 처형되었고, 그 후 신다이나곤과 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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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슌몬인 신다이나곤 | |
---|---|
기본 정보 | |
관위 | 종1위 |
계위 | 종3위 |
본명 | 藤原 伊通 (후지와라 코레미치) |
생몰년 | 1160년 ~ 1221년 7월 23일 |
다른 이름 | 후지와라 코레미치 (藤原伊通) 고마츠도노 (小松殿) 겐슌몬인 신다이나곤 (建春門院新大納言) |
가계 | |
아버지 | 후지와라 무네미치 |
어머니 |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딸 |
자녀 | 후지와라 타다이에 후지와라 이에미치 후지와라 미치히데 후지와라 나가미치 부인: 사이온지 키미코 (西園寺公経の女) 부인: 후지와라 나가카네의 딸 |
관직 경력 | |
1179년 | 종5위하 |
1180년 | 종5위상 |
1181년 | 정5위하 |
1182년 | 종4위하 |
1183년 | 종4위상 |
1184년 | 정4위하 |
1185년 | 종3위 |
1191년 | 정3위 |
1194년 | 종2위 |
1196년 | 정2위 |
1198년 | 곤노다이나곤 |
1202년 | 곤노주나곤 |
1207년 | 곤노다이나곤 |
1218년 | 종1위 |
기타 정보 | |
시대 | 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초기 |
활동 분야 | 구교 |
특징 |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외손 |
2. 생애
12, 13세 무렵 켄슌몬인의 뇨보로 출사하여 신다이나곤이라 칭했다. 켄슌몬인의 고쇼 근처에서 거처를 하사받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2, 3년 정도 뇨보로 지냈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따르면, 13세에 타이라노 코레모리의 정실이 되어, 조안 3년 (1173년)에 로쿠다이를, 2년 후에는 딸을 낳았다.
안겐 3년 (1177년), 시시가타니의 음모가 일어나, 헤이케 타도를 기도했던 아버지 나리치카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처벌받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남편 코레모리는 헤이케 일문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주에이 2년 (1183년) 7월, 헤이케 일문의 냑향에 해당해, 코레모리는 처와 자식을 수도에 남겨두고 서국으로 내려가, 이치노타니 전투 전후로 일문을 이탈해 물에 빠져 자살했다. 남겨진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자녀와 함께 외가 가문의 비호 아래 살았다.
분지 원년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일문이 멸망한 뒤, 호죠 토키마사에 의해 헤이케 잔당 사냥으로 코레모리의 남겨진 자식을 수색했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로쿠다이와 딸과 함께 쇼부다니 (교토시 우쿄구 키타사가키타노단쵸)의 작은 방에 숨어있다가, 같은 해 12월 중순, 한 여자에 의한 밀고로 로쿠다이가 붙잡혔다. 로쿠다이의 유모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신고지에 뛰어들어 몬가쿠 상인에게 로쿠다이의 구명 탄원을 빌고, 몬가쿠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말함으로써, 로쿠다이는 구명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겐큐 초, 신다이나곤은 딸을 데리고 요시다 츠네후사와 재혼했다.
겐큐 10년 (1199년), 산사에몬 사건의 영향으로 로쿠다이는 처형되었다. 쇼지 2년 (1200년), 츠네후사의 사망으로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후지와라노 사네노부의 아내가 된 딸은 겐닌 3년 (1203년) 경, 사네노부가 호죠 토키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그녀와 이혼했다. 딸은 겐에이 원년 (1206년), 31세에 타이라노 치카쿠니와 재혼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치카쿠니가 사망해 과부가 되었다.
그 후의 신다이나곤과 딸의 소식은 알려져있지 않다.
2. 1. 켄슌몬인 출사와 고레모리와의 결혼
덴쇼(天承)8년 12, 13세 무렵 켄슌몬인의 뇨보로 출사하여 신다이나곤이라 칭했다. 켄슌몬인의 고쇼 근처에서 거처를 하사받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2, 3년 정도 뇨보로 지냈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따르면, 13세에 타이라노 코레모리의 정실이 되어, 조안 3년 (1173년)에 로쿠다이를, 2년 후에는 딸을 낳았다.안겐 3년 (1177년), 시시가타니의 음모가 일어나, 헤이케 타도를 기도했던 아버지 나리치카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처벌받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남편 코레모리는 헤이케 일문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주에이 2년 (1183년) 7월, 헤이케 일문의 냑향에 해당해, 코레모리는 처와 자식을 수도에 남겨두고 서국으로 내려가, 이치노타니 전투 전후로 일문을 이탈해 물에 빠져 자살했다. 남겨진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자녀와 함께 외가 가문의 비호 아래 살았다.
분지 원년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일문이 멸망한 뒤, 호죠 토키마사에 의해 헤이케 잔당 사냥으로 코레모리의 남겨진 자식을 수색했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로쿠다이와 딸과 함께 쇼부다니 (교토시 우쿄구 키타사가키타노단쵸)의 작은 방에 숨어있다가, 같은 해 12월 중순, 한 여자에 의한 밀고로 로쿠다이가 붙잡혔다. 로쿠다이의 유모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신고지에 뛰어들어 몬가쿠 상인에게 로쿠다이의 구명 탄원을 빌고, 몬가쿠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말함으로써, 로쿠다이는 구명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겐큐 초, 신다이나곤은 딸을 데리고 요시다 츠네후사와 재혼했다.
겐큐 10년 (1199년), 산사에몬 사건의 영향으로 로쿠다이는 처형되었다. 쇼지 2년 (1200년), 츠네후사의 사망으로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후지와라노 사네노부의 아내가 된 딸은 겐닌 3년 (1203년) 경, 사네노부가 호죠 토키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그녀와 이혼했다. 딸은 겐에이 원년 (1206년), 31세에 타이라노 치카쿠니와 재혼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치카쿠니가 사망해 과부가 되었다.
2. 2. 시시가타니 음모와 헤이케 멸망
안겐 3년 (1177년), 시시가타니의 음모가 일어나, 헤이케 타도를 기도했던 아버지 나리치카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처벌받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남편 코레모리는 헤이케 일문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주에이 2년 (1183년) 7월, 헤이케 일문의 냑향에 해당해, 코레모리는 처와 자식을 수도에 남겨두고 서국으로 내려가, 이치노타니 전투 전후로 일문을 이탈해 물에 빠져 자살했다. 남겨진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자녀와 함께 외가 가문의 비호 아래 살았다.분지 원년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일문이 멸망한 뒤, 호죠 토키마사는 헤이케 잔당 사냥으로 코레모리의 남겨진 자식을 수색했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로쿠다이와 딸과 함께 쇼부다니 (교토시 우쿄구 키타사가키타노단쵸)의 작은 방에 숨어있다가, 같은 해 12월 중순, 한 여자에 의한 밀고로 로쿠다이가 붙잡혔다. 로쿠다이의 유모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신고지에 뛰어들어 몬가쿠 상인에게 로쿠다이의 구명 탄원을 빌고, 몬가쿠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말함으로써, 로쿠다이는 구명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 3. 헤이케 잔당 사냥과 로쿠다이의 출가
안겐 3년 (1177년), 시시가타니의 음모로 아버지 나리치카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처벌받고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남편 코레모리는 헤이케 일문에서 어려운 입장에 놓였다. 주에이 2년 (1183년) 7월, 헤이케 일문이 냑향할 때 코레모리는 처자를 수도에 남겨두고 서국으로 내려갔고, 이치노타니 전투 전후 일문을 이탈해 물에 빠져 자살했다. 남겨진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자녀와 함께 외가의 비호를 받으며 살았다.분지 원년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일문이 멸망한 뒤, 호죠 토키마사는 헤이케 잔당을 수색하며 코레모리의 남겨진 자식들을 찾았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로쿠다이와 딸과 함께 쇼부다니(현 교토시 우쿄구 키타사가키타노단쵸)의 작은 집에 숨어 있었으나, 같은 해 12월 중순, 한 여자의 밀고로 로쿠다이가 붙잡혔다. 로쿠다이의 유모가 신고지에 뛰어들어 몬가쿠 상인에게 로쿠다이의 구명을 탄원했고, 몬가쿠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청하여 로쿠다이는 목숨을 건져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 4. 재혼과 딸의 삶
켄슌몬인의 뇨보로 출사하여 신다이나곤이라 칭해졌으며, 켄슌몬인의 고쇼 근처에서 거처를 하사받아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2, 3년 정도 뇨보로 지냈다. 13세에 타이라노 코레모리의 정실이 되어, 조안 3년 (1173년)에 로쿠다이를 낳고, 2년 후에는 딸을 낳았다.안겐 3년 (1177년), 시시가타니의 음모로 아버지 후지와라노 나리치카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처벌받고 유배지에서 사망하면서, 남편 타이라노 코레모리는 헤이케 일문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주에이 2년 (1183년) 7월, 헤이케 일문의 냑향 때 타이라노 코레모리는 처와 자식을 수도에 남겨두고 서국으로 내려갔고, 이치노타니 전투 전후로 일문을 이탈해 물에 빠져 자살했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자녀와 함께 외가 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살았다.
분지 원년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일문이 멸망한 뒤, 호죠 토키마사는 헤이케 잔당 사냥으로 타이라노 코레모리의 남겨진 자식을 수색했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로쿠다이 및 딸과 함께 쇼부다니(현 교토시 우쿄구 키타사가키타노단쵸)의 작은 방에 숨어있다가, 같은 해 12월 중순 한 여자의 밀고로 로쿠다이가 붙잡혔다. 로쿠다이의 유모가 신고지에 뛰어들어 몬가쿠 상인에게 로쿠다이의 구명을 탄원했고, 몬가쿠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말함으로써 로쿠다이는 구명되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겐큐 초, 신다이나곤은 딸을 데리고 요시다 츠네후사와 재혼했다.
겐큐 10년 (1199년), 산사에몬 사건의 영향으로 로쿠다이는 처형되었다. 쇼지 2년 (1200년), 요시다 츠네후사의 사망으로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후지와라노 사네노부의 아내가 된 딸은 겐닌 3년 (1203년) 경, 사네노부가 호죠 토키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그녀와 이혼했다. 딸은 겐에이 원년 (1206년), 31세에 타이라노 치카쿠니와 재혼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치카쿠니가 사망해 과부가 되었다.
그 후의 신다이나곤과 딸의 소식은 알려져있지 않다.
2. 5. 그 후
켄슌몬인의 뇨보로 출사하여 신다이나곤이라 칭해졌으며, 켄슌몬인의 고쇼 근처에서 거처를 하사받아 2, 3년 정도 뇨보로 지냈다. 13세에 타이라노 코레모리의 정실이 되어, 1173년에 로쿠다이를 낳고, 2년 후에는 딸을 낳았다.1177년, 시시가타니의 음모로 아버지 나리치카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처벌받고 유배지에서 사망하면서, 남편 코레모리는 헤이케 일문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183년 7월, 헤이케 일족이 수도를 떠날 때, 코레모리는 처자를 수도에 남겨두고 서쪽으로 내려갔고, 이치노타니 전투 전후로 일문을 이탈해 물에 빠져 자살했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자녀와 함께 외가 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살았다.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 일문이 멸망한 뒤, 호죠 토키마사는 헤이케 잔당을 수색하며 코레모리의 남겨진 자식들을 찾았다. 신다이나곤노츠보네는 로쿠다이와 딸과 함께 쇼부다니의 작은 방에 숨어있다가, 같은 해 12월 중순, 한 여자의 밀고로 로쿠다이가 붙잡혔다. 로쿠다이의 유모가 신고지에 뛰어들어 몬가쿠 상인에게 로쿠다이의 구명을 탄원했고, 몬가쿠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말함으로써, 로쿠다이는 구명되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겐큐 초, 신다이나곤은 딸을 데리고 요시다 츠네후사와 재혼했다.
1199년, 산사에몬 사건의 영향으로 로쿠다이는 처형되었다. 1200년, 츠네후사가 사망하여 다시 과부가 되었다. 후지와라노 사네노부의 아내가 된 딸은 1203년 경, 사네노부가 호죠 토키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이혼당했다. 딸은 1206년, 31세에 타이라노 치카쿠니와 재혼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치카쿠니가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다.
그 후의 신다이나곤과 딸의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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